적자생존(適者生存)이란 말이 있다. 적자생존의 뜻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되어 사라지는 현상을 뜻한다. ‘적자’ ‘생존’ 적어야 산다라면?

왜 적어야 할까?

책을 읽다가 나를 숨죽이게 하는 구절을 만났다.

그럼 얼른 메모한다. 블로그든 카페든 비공개로 해놓고 글을 메모해두고 생각이 정리되면 발행한다. 외출할 때 수첩과 볼펜을 늘 가지고 다닌다. 종이 위에 펜으로 쓰면 오감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종이와 펜의 촉감, 피부에 와 닿은 종이, 하얀 종이, 삼색 볼펜등의 색감, 사르락사르락 글씨 쓰면 들리는 소리, 그래서 오감으로 쓰는 손글씨도 좋다.

4차산업혁명시대 메모장, 블로그, 카페, 홈페이지 등 언제 어디서나 메모는 가능하다.

좋은 생각,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얼른 메모했다. 좋은 글을 보면 메모해야 한다. 내 기억력은 없어져 버리지만 메모해 두면 잊어버리지 않는다.

필요할 때 보고 꺼내 쓰면 된다.

그리고 내 머리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것을 가성비가 좋을까?

오늘 성공자에 대한 나의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구절이다.

“실패를 수천만 밟고 일어선 이를 성공자라고 합니다.

실패를 적게 한 사람을 실패자라 부릅니다.”

실패는 없다.  성공을 위한 한 계단 오르기라고 생각하며 실패에서 배우면 되고 똑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실패자임을 알아차리자. 오늘도 나는 명언들, 책 속 한 구절을 메모하며 생각한다.

 

2024년 2월이었다.

‘환갑에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 올해는 무엇을 배울까?’ 고민하다가 원주평생학습관에서 모집하는 자서전 쓰기를 신청하였다. 3월부터 5월까지 석 달 동안 매주 월요일 2시부터 4시까지 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도 선생님은 권순형선생님이었다.

지도 선생님은 ‘남자라면 잘 생겼을까? 여자라면 예쁠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일까? 내가 과연 글쓰기 과정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설렘과 두려움으로 개강일을 기다렸다.

선생님께서 개강 전에 모임 장소, 위치, 준비물 등 안내 문자를 보내 주셨다.

첫 시간이 되었다. 수강생들과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선생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하셨다.

“자서전을 왜 쓸까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기고 갈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내 자녀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었다. 돌아보니 지금 내 모습은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였다. 살면서 지혜롭지 못하여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는데 내 자녀는 좀 더 지혜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도 육십에 자서전을 쓰면서 그동안 내 삶을 돌아보고 맺힌 것은 풀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갈지 방향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명륜작은도서관 관장을 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시인으로 40년 글을 쓰신 팔방미인이셨다.

“문고리와 여자는 살살 다뤄주세요. 노사연은 사연이 없어 자서전을 못 써요. 여러분은 경험이 많으니 자서전을 잘 쓸 수 있어요.”

수업 시간에 일어나는 상황마다 유머와 위트로 때론 적재적소에 재치 있는 언어로 수강생들에게 격려와 웃음과 감동을 주셨다. 나는 매주 월요일 2시가 기다려졌다.

석 달 동안 가장 강조하셨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았다.

“쓴 글을 50번 읽고 고쳐라.”

그동안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글쓰기 비법 중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3가지로 요약해보았다.

첫째, 쓴 글의 제목을 10개 생각하라.

제목이 반이다. 제목을 보고 읽고 싶은 욕구를 느낄 수 있도록 제목을 먼저 쓰고 글을 쓰든 쓴 글을 보고 제목을 쓰든 10개 이상 써 보아라.

이런 자서전의 제목은 어떠세요. <돌아보니 감사 아닌 것이 없네>라고 예를 들어주셨다.

둘째, 나의 특별한 기억을 써라. 처음엔 5줄 정도 메모부터 시작하라.

나는 유년 시절, 아버지, 엄마, 초등학교, 청소년 시절, 대학 시절, 직장생활(36년), 결혼생활, 출산, 투병, 자연 건강법, 나를 살린 1권의 책, 독서 코칭 3년, 글쓰기를 배우다, 시니어 독서 모임 등의 특별한 기억을 쓸 것이다.

셋째, 한 가지 주제만 써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가지 주제를 자세히, 읽는 사람이 그림을 그려가듯이 써라

나는 자서전 쓰기를 배우는 동안 네 편의 글을 썼다. 이 글들을 계속 50번 소리를 내어 읽고 고쳐나가야 한다.

글쓰기 지도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이 쓴 글을 본인이 소리내어 읽게 하고 선생님께서 다시 읽어가며 글을 수정해주셨다. 어떤 부분은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글을 고친다는 것은 글을 매끄럽게 한다는 것이다. 퇴고 요령들을 메모해 두었는데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띄어쓰기

(예)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 순서 생각하고 바꾸기

(예) 글을 현재에서 과거로 쓸 것인지 과거에서 현재로 쓸 것인지를 생각하고 써라.

  • 사실적으로 늘려서 쓰기

(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늘려서 쓰고 여러 가지 뜻이 있을 때는 한자를 넣는 것이 좋다.

(예) 별사탕 모양으로 생긴 산 뽕(재래종) 오디를 따먹는 재미에

(예) 성(姓) 성(星)

  • 한 문장에서 중복된 단어는 빼라.

(예) (추운) 겨울날

  • 말하는 용어 대신 글 용어로 다듬어라.

(예) 집으로 갔다 → 집으로 왔다.

  • 문장을 적당히 끊어라.

(예)

  • 시제에 맞게 써라.

(예) 과거(있었다), 현재(있다), 미래(있을 것이다)

  • 고유명사는 붙여 써라.

(예) 강원특별자치도교육청

  • 나이는 한 글로 써라. 날짜가 중요하지 않을 때는 빼라.

(예) 6살 →여섯 살

  • 50번 읽으며 고쳐라.
  • 쓰는 단어를 자꾸 생각해 봐라.

(예) 즉각- 바로

  • 띄어쓰기, 맞춤법의 어긋남으로 독자들이 글을 읽을 때 글의 흐름을 막지 말아라.
  • 작가가 쓰고자 하는 것이 무엇에 가까운지 고민하라.

(예) 마음에 깊이 남는다. 마음에 오래 남는다. 마음에 생생하게 남는다. 마음에 어제처럼 남는다.

  • 나만의 언어를 만들어라.

(예) 구름에 달 가듯이

  • 글을 보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써라.​
  • 계속 쓰고 고쳐나가라. 프린트해서 보면 고칠 것이 또 보인다. 고치다 보면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도 있다.

글쓰기 고수 선생님께서는 이제까지 쓴 글을 보면 쓰는 사람의 특성이 보인다며 내 글을 평해 주실 때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글의 재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10번도 안 읽고 와요” 선생님의 말씀에 뜨끔했다.

 

내 마음마저 치유해주시는 선생님께서는 글은 쓰는 사람의 속내를 다 드러낸다며 울화병,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글쓰기는 치유다. 글을 쓰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고 맺혔던 사람은 풀라고 말씀해 주셨다.

누가 강요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며 아빠를 생각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 남이 쓴 글을 듣고 ‘나도 저런 주제로 써 볼 걸,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쓰는 것’이 자서전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글을 쓰면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데 포기하지 말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걸어가자.

 

삶의 경험이 많으신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 좋은 생각과 좋은 남자는 금방 도망간다. 글로 써라
  • 인생은 경험이다.
  • 작가는 고요한 시간이 많아야 한다.
  • 그럴싸하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 말고 내 마음에 씨를 뿌리고 기다려야 한다.
  • 글 쓰는 사람들과 같은 곳을 가야 한다.
  • 사진을 찍고 오감으로 체험하며 연구하고 교감하며 글을 써라

 

선생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순형이 글은 참 따뜻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글 속 따뜻함을 직접 느꼈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해마다 밭을 갈지 않아도 되는 퍼머컬쳐를 실천하며 가꾸시는 서곡 숲 농장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의 글 읽는 소리가 서곡에 울려 퍼졌습니다. 유리온실에서 빗소리 들으며 부쳐놓으신 미나리전도 먹고 수강생들이 춥다고 하니 난로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주셨습니다. 어제 소나무 전지를 하며 느꼈던 마음을 밤에 썼다고 하시며 아직 다듬지 않은 글이라며 우리에게 쓴 시를 읽어주셨습니다.

 

소나무 전지를 하다(4/15)

권순형

더벅머리같이 솔잎들이 쌓인

소나무 가지를 싹둑 자른다.

 

한 가지 또 한 가지

오전 내내 소나무 가지 사이로 길을 낸다.

 

그 길 너머로

하늘이 맞닿는다.

 

버릴 것을 다 버린 소나무가

단아하다.

 

아직도 마음에서 버릴 것이 많은 나는

소나무 앞에서 또 부끄럽다.

 

언제쯤이면

저 소나무처럼 나도 단아해질 수 있을까

 

욕심 하나를 벚꽃잎 위에 슬쩍 얹자

바람이 데려간다.

 

나도 언제쯤 선생님처럼 멋진 시를 쓸 수 있을까?

오감으로 교감한다는 것이 이런 거라는 것을 농장 체험, 선생님의 시를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유리온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가 오는 날 글쓰기 교실 풍경은 늘 그리울 것 같습니다.

내년 벚꽃이 한창일 때 농장에서 내가 쓴 글을 읽으며 또 다른 수강생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분 한 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시고 매시간 늘 격려해주시고 글을 쓸 수 있게 이끌어주시는 권순형 선생님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64년 동안 글은 좋은 친구였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글을 친구 삼고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신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앞으로 나도 선생님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글은 나의 좋은 친구가 될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은 주인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글쓰기를 배우며 마음이 따뜻해지고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도 듣고 배우며 나를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의미있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한 글쓰기 동료들에게도 많이 배웠습니다.

‘글쓰기를 처음 배웠던 석 달을 돌아보니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네요.’

 

아버지의 100세 건강법

아버지는 올해 아흔둘입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거의 다 돌아가시고 남은 친구들 몇 분은 입원해 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아버지는 집에서 2㎞ 떨어진 성당에 다니시는데 주일에 예배드리러 걸어 다니십니다. 대상포진으로 오랫동안 약을 드셨고 이가 거의 썩어 몇 개 남은 치아로 오물오물하며 조금씩 음식을 드십니다. 임플란트는 안 하신다고 하셨어요.

저는 2년 전 겨울, 우연히 아버지께서 상조보험에 가입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조보험은 상조(喪助) 때 보통 자식들이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입합니다. 언니가 부모님 상조보험에 가입했다고 해서 나는 들지 않았습니다.

상조보험은 본인이 사용해야 하므로 찾아서 여행 등 필요한 곳에 쓰시라고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본인의 장례 준비로 보험을 들어놓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보험증서를 보니 만기가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꼭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고 싶으면 제게 계약자 변경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계약자를 변경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단양에서 원주까지 기차를 타고 오셨습니다. 모시러 간다고 했는데 극구 사양하셨습니다. 원주에는 원주역과 서원주역 두 개의 기차역이 있습니다. 기차 도착시간에 맞춰 서원주역에서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기차가 도착한 후 사람들은 다 역으로 나왔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계속 통화하면서 찾으러 다니는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곳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 옆에 누가 있으면 전화 좀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과 통화하고 나서 아버지가 원주역에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편히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서원주에서 원주역까지 자동차로 30분 거리인데 1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원주역을 남원주로 이전해서 남원주역으로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출발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남원주 요금소였습니다. 뒤따라오는 차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요금소로 진입하였습니다. 신림 요금소에서 되돌아와야 하나. 북원주로 요금소로 되돌아와야 하나 망설이다 북원주 요금소를 선택했습니다. 요금은 계산되지 않았습니다. 원주에서 29년을 살았는데 원주가 이렇게 크다니, 원주의 동서남북을 자동차로 운전하며 잠시 생각했었습니다. ‘직접 단양으로 모시러 갈 것을, 미리 원주역을 검색하고 출발했다면, 남원주역이 아니라 원주역이란 명칭을 정확히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낯선 곳에서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운전 도중 중간중간 전화를 드렸지만, 아버지가 걱정되었습니다. 드디어 기차가 서원주역에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에 원주역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면서 저를 반겨주셨습니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의 얼굴, 지금도 겨울에 한 시간 동안 나만 기다리며 서 계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코끝이 찡합니다. 아버지의 상조보험은 이제 만기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상조보험도 아버지께서 가입해 놓으셨습니다. 당시 납부 기간이 반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현재 엄마의 상조 보험금은 제가 매달 납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늙어 자식에게 짐이 되시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자신의 장례 보험 및 엄마의 장례 보험까지 가입해 놓은 것입니다. 돌아가신 뒤까지 준비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앨범에는 단양면사무소 앞에서 여동생이랑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입니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가 무척 무서웠습니다. 어느 날 술을 드시고 온 날에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께 뺨을 한 대 맞아 가슴이 쪼그라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론 아버지가 정말 무서웠습니다. 아버지가 상수도 사무실에서 숙직하실 때 그곳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2㎞ 되는 거리였는데 혼자서 걸어갔습니다. 아버지는 여기까지 저녁에 무엇 하러 왔느냐고 얼른 집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곳이 궁금해서 갔는데 숙직하시는 곳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온 날, 기분이 좋으시면 내 귀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고향 무정’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의 지갑에서는 돈이 술술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가 저는 제일 좋았습니다. 밤새 행복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은 모두 반납이었지만요.

아버지 덕분에 당시 부사라는 귀한 사과도 많이 먹었습니다. 국광도 맛있었지만, 부사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우리가 바나나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바나나를 사 오셨습니다. 전 그때 잔뜩 기대했던 바나나의 맛을 보고 노란 바나나는 정말 맛이 이상하여 실망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과일을 잘 사다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으셨고 피부도 하얗고 깨끗하셨습니다. 결혼식 사진을 보니 조각 같은 미남이셨습니다. 친정집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보며 친정 갔을 때 엄마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셨느냐고 여쭈어보았습니다.

” 이뻤어, 내가 군산에서 하숙하고 있을 때 한눈에 반했지.”

왜 군산에서 하숙하셨어요?

“1950년대는 지금의 군 복무 대신 나는 간첩 잡는 일을 했단다. 당시에는 정말 간첩이 많았다.”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들으니 요즈음 대한민국이 1950년대와 나라가 똑같다는 것을 느낍니다.

아버지 별명은 ‘일본 순사’라고 엄마가 말씀해 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40대에 “재떨이 치워라.”라는 말씀 하나로 담배를 끊으셨습니다. 저는 남자들이 담배를 끊는 것이 쉽다고 생각했으나 나의 착각이었습니다. 남편은 여태 그 독한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건강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40대에 신앙생활 시작하기, 담배 끊기, 술 절제하기, 걸어 다니기, 자주 목욕하기, 텃밭에 채소 가꾸어 먹기, 소식(小食), 잠 충분히 자기 등 몸에 좋은 것만 실행에 옮기시는 분이셨습니다. 자식들에게 피해 가지 않게 본인의 건강을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는 성당에 다니시면서도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는 성당 다니시는데 왜 제사를 지내셨어요?”라고 그 이유를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장남이잖아”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엄마 나이 87세까지 집안 3대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엄마는 올해 89세로 작년에 방광암이 재발하여 자연 의학으로 치료하고 계십니다. 이제 제사는 지내지 않으십니다. 요즘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 목뼈 큰돌기 두드리기를 하루에 두 번 꼭 해주신다고 엄마가 자랑하셨습니다. 엄마가 속옷을 벗어 놓으시면 아버지께서 얼른 빨아 너신다고 합니다. 엄마는 아버지께서 젊어서는 속을 썩였는데 지금은 아버지가 최고라고 하십니다.

‘자식은 다 부모에게 관심 없지요. 부부 백년해로하세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매일 기도해 주십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에게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은 ‘사랑한다.’였습니다.

듣지 못한 말이 아니라 늘 내게 “너를 위해 기도한다’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신 걸 나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엄마와 나는 매일 문자 메시지로 대화를 주고받고 전화로 엄마의 건강 상태를 묻습니다. 오늘 통화했을 때 마침 엄마는 아버지로부터 목뼈 큰돌기 두드리기를 받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바꿔줄게.”

엄마가 아버지께 전화기를 드리자 나는 ‘좋은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용기 내어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엄마에게 매일 안마를 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사랑해요!”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 사랑한다고 말하는 데 무려 60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쉽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표현해야겠습니다. 부모님께도, 내 가족에게도.

요즘 저는 부모님과 소통하며 부모님의 넓고 깊은 마음을 알게 되면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행동은 아버지를 오래도록 장수하게 하시는 비밀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40대에 생각을 바꾸시고 실천하신 신실한 신앙생활, 건강을 위한 절제력, 결단력,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 실천하셨던 것들이 장수의 비결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건강을 위해 해마다 봄, 가을에 단식합니다. 올해 첫 단식을 마음먹고 시작해야겠습니다. 저는 10년 전부터 자연 의학을 배워 건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합니다. ‘정장 정혈’과 ‘척주 바르게 하기’는 자연 의학의 큰 기둥입니다. 비만은 건강의 적입니다.​

건강을 1순위로 생각하셨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문득 미국의 사상가 사무엘 스미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건강한 인생으로 바꾸려면 생각부터 건강하게 바뀌어야 하겠죠. 아버지께서는 건강을 1순위로 생각하시고 40대부터 심신의 건강을 위해 실천하셨습니다. 신실한 신앙생활, 소식(小食), 담배 끊기, 술 절제하기 등 건강법들을 지금까지 꾸준히 실천하고 계십니다. 꼿꼿하시던 아버지의 등이 굽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아버지처럼 100세까지 건강한 인생을 꿈꾸고 건강법들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밥 한 그릇

결혼해서 나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 큰아이를 낳고 아버지께서 매포읍장으로 발령 나셨을 때 부모님을 뵈러 간 적이 있었다. 매포는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날 당시가 궁금했는데 엄마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너는 매포에서 음력으로 3월 2일, 저녁 7시 무렵에 낳았어. 배가 너무 아픈데 네가 안 나오는 거야! 낳기가 너무 힘들어 결국 의사를 불렀단다. 아들 둘은 쉽게 낳았는데 세 딸을 낳을 때는 모두 의사를 불렀지. 언니와 오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 적성에서 낳고 너는 아빠가 여기서 근무하실 때 낳았다. 여기 올 때 할머니께서 빈 밥솥만 줄 수 없다며 밥솥에 밥 한 그릇과 참기름 한 홉을 넣어주셨어. 그 참기름을 아껴 아버지만 드리다가 나중에는 참기름이 찌들어서 못 먹었다. 물자가 귀하고 없으니 아낄 수밖에 없었다. 단칸방에 연탄을 땠었는데 겨울에도 연탄 한 장으로 하루를 살았어. 걸레를 짜서 방을 닦으려면 너무 추워서 걸레가 얼었지. 그래서 너희들 손이 시리 울까? 방에서도 장갑을 끼웠다.”

“그럼 엄마는 안 추우셨어요?” 하고 내가 여쭈었다.

“나는 젊어서, 춥지 않았어.”라고 말씀하셨다.

손이 시리 울까? 우리 손에 장갑을 끼워주셨다는 것은 엄마도 무척 추우셨다는 것이다.

“그럼 집은 관사에 사신 거예요?”

“관사도 아니었고, 1960년대 다른 곳으로 발령 나서 가신 분이 쓰던 집에서 공짜로 살았다.”

“와–, 공짜로 살다니, 시골 인심은 좋았네요.”

‘현재 서울 집값은 장난이 아니다. 나의 막내아들은 서울 옥탑방에서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 50만원을 주고 사는데…….’

내가 태어난 60년대는 지금과 딴 세상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당시 쌀이 없어서, 먹을 것이 귀해서 돈이 있어도 쌀을 살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위로 언니, 오빠, 아래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가 출장 가시는 날에는 밥 한 그릇을 가지고 물을 넣고 한 솥 끓여 다섯 식구가 먹었다고 하셨다. 겨울에는 연탄 한 장으로 하루를 버티고 알뜰살뜰 살림하며 우리 5남매를 키우셨다.

엄마 말씀을 듣고 나는 ‘엄마, 나 아들 낳고 직장 다니기 너무 힘들어!’라고 응석을 부리듯 말하고 싶었지만 힘들게 5남매를 키우시며 생활하셨던 엄마 앞에서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만 되새기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 난다.

괴테는 말했다.

“과거를 잊는 자는 결국 과거 속에서 살게 된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 후 10대 빈곤 국가에서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다. 60년대는 시골에서 집은 공짜로 살 수 있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집값이 폭등하여 젊은 사람들은 적령기에 결혼도 못하고 있다. 여러 원인도 있겠지만 출생률도 현저히 낮은 상태이다. 예전에는 쌀이 부족해서 돈이 있어도 사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쌀 소비가 안 돼서 남는 것 또한 문제다. 시대마다 경제 상황은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엄마는 남매들을 정성껏 키워주셨고 그 덕분에 우리 남매들은 잘 살 수 있었다. 찌들어서 못 먹었다는 참기름 한 홉과 한겨울 연탄 한 장으로 버티기, 밥 한 그릇은 알뜰살뜰 살림하며 사셨던 엄마를 떠올리는 상징으로 늘 기억될 것이다. 엄마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늘 말씀하셨던 절약, 저축 등 아끼는 생활 습관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 같다. 어려운 시절에도 5남매를 낳았고 잘 키워주신 엄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마음 깊은 곳에 엄마의 마음을 담으며 나 또한 내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여럿이 나누어 먹으며 살기 위한 ‘밥 한 그릇’을 생각하며 나는 가난은 대물림되지 않아야 된다는 마음을 가슴속 깊이 느껴본다.

나는 82학번입니다. 대학교 다닐 때 교수님들이 수업에 들어오시면 제일 먼저 출석을 부르십니다. 내 이름을 부를때면 이름을 부르신 후 안용화의 ‘화(㳸)’자가 무슨 화자예요? 라고 물으십니다. 그럴 때마다 급우들은 ‘물 맑을 화’라고 합창을 합니다. 교수님들의 출석 부르기로 저희 반 친구들은 내 이름의 화(㳸) 자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만 번 불리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 맑을 화(㳸)라고 40명의 급우들이 일제히 말하면 나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용(鏞)자를 돌림으로 용선, 용원, 용화, 용인, 용만입니다. 사촌들은 용숙, 용옥, 용환, 용덕… 입니다. 사촌들 이름까지 모두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당시 제가 갖고 있던 옥편에서 제 이름의 화자를 찾아보았는데 ‘물 맑을 화(㳸) 자는 없는 한자였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를 뵈러 가서 제 이름의 한자가 옥편에 없는데 어떻게 지으신 거예요? 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가지고 계신 옥편을 보여주시면서 ‘물 맑을 화(㳸)’자를 보여주셨습니다. 겉표지가 까만 옥편에는 물 맑을 화(㳸) 자가 정말로 보였습니다. ‘진짜 물 맑을 화(㳸)자가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는 “물이 맑은 것처럼 늘 인생을 맑고 정직하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벽장에 있던 쿰쿰한 냄새가 났던 옥편은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 작은아버지께 그 옥편을 달라고 졸랐는데 주시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몇 년 뒤 작은아버지께서는 사시던 집 길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새로 지으신 작은아버지댁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그 옥편을 꼭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올가을에는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하여 작은엄마도 뵙고 내 이름에 들어간 물 맑을 화(㳸)자가 적힌 옥편을 꼭 갖고 싶다고 작은아버지께 말씀드려 만약에 주시면 그 옥편을 간직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블로그에 글을 쓰다가 화자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끝부분에 뜻이 없는 한자로 ‘물 맑을 화(㳸)’가 보여서 신기했습니다. 그동안 이름을 한자로 문서에 쓸 때 물 수(氵)와 꽃 화(花)를 장평 90%로 줄이고 자간 –50%로 글자 간격을 줄여서 물 맑을 화(㳸) 자를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안용화(安鏞㳸) 이름 석 자를 오랜만에 한자로 쓰면서 할아버지댁에서 보낸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려봅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할아버지댁에서 살았습니다. 이불 펴고 여섯 식구가 누우면 꽉 찬 단칸방에서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는 할아버지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지으셔서 칠 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에 일어나시면 소죽부터 끓이셨습니다. 저도 할아버지를 따라 일어났습니다. 소죽 끓이는 할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넣기도 했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가을엔 여기저기서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돌배들을 주웠습니다. 툭툭 떨어져 터진 돌배는 주워서 상할까 봐 제일 먼저 먹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농사짓던 밭에는 대추나무, 밤나무가 한그루씩 있었습니다. 탱글탱글한 빨간 대추를 따서 입 속에 쏘옥 넘으면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알밤이 떨어질 때면 도랑을 지나고 밭둑을 지나 혼자 밤을 주우러 갔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겨울에 군불을 화로에 담아 방에 두십니다. 화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몰래 밤을 굽다가 불꽃이 있는 재가 탁탁 사방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불이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며 밤껍질에 칼집을 넣어 밤을 구워주셨습니다. 뒷산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긴 장대 끝에 그물주머니를 감아 할아버지와 삼촌은 하나씩 하나씩 감을 따셨습니다. 그 감들을 할머니께서 깎고 할아버지께서는 짚을 꼬아 만든 새끼줄 사이 사이에 감을 넣어 처마 밑에 매달아 주십니다. 햇빛과 바람이라는 마술의 시간이 지나면 분이 하얗게 핀 곶감이 됩니다. 할머니께서는 나머지 감들을 다락 방에 펼쳐놓으십니다. 할머니는 곶감, 익은 감들을 시장에 내다 파셨습니다. 곶감은 설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익어가는 감은 할머니께서 주실 때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이 많고 달콤한 감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이었습니다. 물이 많고 무척 달았던 할아버지 댁 감 맛을 그 후론 한 번 정도 먹어보고 그 맛과 비슷한 것을 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겨울에 먹는 대봉감도 익으면 껍질도 두껍고 약간 텁텁하기도 하고 물이 많지 않습니다. 5일마다 열리는 단양 장날이면 할아버지를 따라 엄마가 계시는 단양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여동생은 내가 집에 가면 “너희 집에 가라”라고 나를 구박했습니다. 난 울며 할아버지를 따라 다시 할아버지 댁으로 가곤 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습니다. 남동생하고 4살 차이니 4년은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들입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서 저녁 밥으로 찐 옥수수, 찐 감자를 먹었습니다. 특히 찐 감자 위에 할머니가 당원을 넣고 쪄 주신 밀가루 빵은 쫄깃쫄깃하고 참 맛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장에 가신 날은 어둑어둑해지면 할머니께서 ‘저 대문 안으로 언제 오실까?’ 하며 기다리다 늦게 오시면 큰길까지 마중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커서 할아버지, 할머니 제주도 여행 꼭 보내드릴게요”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워킹맘으로 36년을 살았습니다. 큰아들이 아기였을 때 나는 새벽에 일어나 젖병 삶고 기저귀, 옷, 간식 등을 챙기고 아이가 일어나면 밥을 먹여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를 돌봐주는 아주머니께서 집으로 데리러 오셨는데 아주머니가 아들을 업고 함께 집을 나서다가 갈림길에 다다르면 아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기 시작합니다. 나도 울음을 삼키면서 직장에 갔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퇴근 후 아주머니댁으로 가면 대문 앞에서 큰아들은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아들이 결혼하여 어엿한 쌍둥이 아빠가 되었습니다.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때 내가 싸준 김밥이 제일 맛있었고 친구들도 맛있다고 하며 그 김밥이 가끔 먹고 싶다고 합니다. 막내아들도 이번 주 일요일에 결혼합니다. 내일 아들이 집에 오면 미나리를 듬뿍 넣은 김밥을 싸주어야겠습니다.

지금도 새벽 4시면 자연히 일어나집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할아버지와 함께 보내면서 일찍 일어났던 습관은 지금 생각하니 세상을 살아가는데 좋은 습관이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따라 일찍 일어났던 습관 덕분에 가정생활, 직장생활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의 1시간은 밤의 3시간에 필적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 무의식이 이완된 나를 교육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은 아침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럴 때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합니다. 2년 전 퇴직한 나는 아침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으로 쓰고 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어주신 이름과 일찍 일어났던 습관은 할아버지께서 주신 소중한 유산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아침에 준비할 것이 많은 나는 두 아들을 잘 키워낼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감사합니다.

매일 걷는 산책길에 아름드리 돌배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배꽃을 보면 검게 탄 얼굴에 유독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4월이 되어 하얀 배꽃이 피면 할아버지가 더욱 보고 싶습니다. 오늘 새벽에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한자로 써 보면서 ‘너는 맑은 물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니?’라고 나에게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반성합니다.’ 앞으로는 할아버지의 뜻을 담아 지어주신 내 이름대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