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하) 제74강’ 신원균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바탕으로, 성경적 국가관이란 무엇이며 국가의 책무와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정치에 무관심해야 하는가?

디모데전서 2장 1~2절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경건함 속에서 예배의 자유를 누리고, 안정적으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함입니다. 신원균 목사님은 기독교인이 국가 위정자나 정치에 중립을 지키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정치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교회의 독립성과 시민의 의식주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장과 권세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저항

로마서 13장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은 선거로 뽑히지만, 그 권위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부라 할지라도 합법적인 권위라면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복종이 맹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위정자가 하나님이 주신 권한을 남용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반기독교적’ 행태를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사적으로 존 낙스와 칼빈 등 개혁주의자들은 사울왕을 피했던 다윗의 군대 조직 사례나, 영국의 청교도 혁명(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 배경)을 들어 ‘하위 위정자들을 통한 정당한 무력 저항’이 가능함을 가르쳤습니다. 순종할 때는 철저히 순종하되, 신앙의 양심을 억압하는 악법에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 참된 기독교인의 자세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부 형태와 견제 장치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 20장을 통해 특정한 정부 형태만을 고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 때문에 왕 1인이 통치하는 군주제는 독재로 빠지기 쉽고, 대중이 통치하는 직접 민주제는 선동에 휩쓸린 중우정치(난동)로 타락하기 쉽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다수의 권력체가 서로를 견제하는 ‘공화정’ 혹은 ‘대의 민주주의(귀족+민주정치의 결합)’가 가장 안전하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의 ‘삼권분립’은 바로 이러한 성경적 인간관(죄성)에 기초하여 권력의 독점을 막는 훌륭한 장치입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의 공화국입니다. 공화국이라는 개념에는 삼권 분립을 말하는 겁니다. 법치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법의 지배를 받아야 되고 또 그 법의 권력은 분리되어서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권 분립이라는 개념이 아주 중요한 근대 민주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국회가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행정부를 집어삼켰고 그리고 사법부까지 전부 다 집어삼켜서 삼권분립이 무너졌습니다. 국회의원은 누가 뽑죠? 국민들은 국가가 통제국가로 가는 현실을 깨닫고 바른 정치 참여와 올바른 선거로 깨어나야 합니다.

왕(국가)의 책무: 율법의 보존과 칼의 권세

국가의 가장 큰 책무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며, 부차적으로 교회가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위정자에게 ‘칼의 권세(사형제도, 합법적 전쟁, 경찰력 등)’를 주셨습니다. 극단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이단 제세례파와 달리, 정통 개혁주의는 왕이 악인을 처벌하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경건에 위배되지 않는 합당한 직무로 봅니다. 개인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국가는 공의를 위해 악을 응징해야 합니다. 성도 역시 자신의 재산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합법적인 공권력이나 재판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출애굽기 32:25~29 
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26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금 징수와 위정자의 절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걷을 합법적 권한이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6절도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왕들에게 “세금은 백성들의 고혈(피)임을 명심하고, 사치와 낭비를 피하며 조심스럽게 사용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를 현대에 적용하여, 과도한 세금(1가구 1주택에 대한 징벌적 세금 등)으로 국민의 기본 생존권과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정책을 비판하며, 교회가 이러한 국가의 세금 정책에 대해서도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무관심과 회피가 아닌 성경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국가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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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기독교인은 정치에 중립을 지키고 무관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A.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장과 로마서 13장에 따르면, 국가의 법과 제도는 성도의 예배 자유와 생존(재산, 생명)에 직결됩니다. 따라서 교회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정치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것은 성도의 의무입니다.
Q2.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신자가 재판을 걸거나 전쟁에 참여해도 되나요?
A. 네, 가능합니다. 개인적인 복수심이 아니라,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마련한 합법적 제도(재판, 고소)를 이용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또한 국가는 방어를 위해 합법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극단적인 무저항주의는 성경적 가르침(칼빈주의)과 거리가 멉니다.
Q3. 국가가 교회를 핍박하거나 악법을 강요할 때도 무조건 순종해야 하나요?
A. 아닙니다. 국가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범위 내에서 유효합니다. 정부가 반기독교적인 법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할 경우, 기독교인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저항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무력 저항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 개혁주의의 입장입니다.
‘기독교강요(하) 제73강 4권 20장 1~7항’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기독교인은 정치에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교회는 국가의 일에 무관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주일 오후 예배 신원균 목사님의  설교를 바탕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올바른 국가관과 신자의 정치적 책임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독교 강요 세트를 함께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기독교 강요: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 두 왕국론의 조화

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21절을 통해 국가(가이사)와 교회(하나님)의 역할이 각각 존재함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장로교 개혁주의의 ‘두 왕국론’과 ‘정교분리 원칙’은 국가와 교회를 완전히 분리하여 단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늘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의 시민으로서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조화롭게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인 것처럼 혼합되어서도 안 되지만, 반대로 국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한 채 ‘신앙’만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마태복음 22:21 KRV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 정치적 중립과 무관심의 위험성 (제세례파의 오류)

설교에 따르면, 오늘날 ‘정치적 중립’이나 ‘무관심’을 외치는 태도는 종교개혁 당시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제세례파’의 오류와 맞닿아 있습니다. 제세례파는 신자가 국가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며 극단적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치안, 국방, 경제, 사회 윤리 등 국가의 법과 제도가 무너지면 결국 성도들의 생명과 재산, 나아가 예배의 자유까지 위협받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고린도전서 7:21 KRV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3. 위정자의 책임과 성도의 적극적 참여

하나님은 성도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라는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이 위탁하신 권위를 가지고 공의롭게 통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 역시 국가가 바른 길을 가도록 투표와 입법 활동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특히 포괄적 차별금지법, 모자보건법 개정 등 성경적 진리와 교회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기독교적 정책이나 법안이 추진될 때는 단순히 기도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연대하여 단호하게 저항하고 막아내야 함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의 올바른 국가관은 맹목적인 순종이나 완전한 외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 질서를 존중하되, 그 권력이 교회를 핍박하고 성경의 가치를 훼손하려 할 때는 거룩한 저항을 불사하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23 KRV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4. 기독교 강요: 개혁주의 신앙 국가관과 관련한 성경 구절

디모데전서 4:2 KRV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신명기 1:16 KRV

“내가 그 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 할것이라.

시편 82:1 KRV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로마서 13:1 KRV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잠언서 8:15 KRV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국가의 왕은 하나님이 세워 준다라는 거예요. 그 권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라는 거예요. 비록 시민의 선거로 뽑는다 할지라도 그 막강한 권력과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라는 거예요. 반대로 국가가 교회를 핍박할 때, 우리는 죽기 설기로 악한 왕에게 교회를 핍박하는 왕에게 저항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다라는 거예요. 존경할 때도 단지 선거의 수준으로 그렇게 존경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신적인 권위로서 높이 더 높이 존중하는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성격이 개팍하고 조금 학력이 모자르고 이런 다양한 이유로라도 대통령이 됐다 할지라도 우리는 존중해야 되는 거예요. 또 정당이 좀 다르더라도 존중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교회의 적대적이고 교회를 핍박한다면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되는 겁니다.”

– 신원균 목사 설교 중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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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마지막 장이 왜 국가론으로 끝나는가? | 교회와 정치의 올바른 관계]

❓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기독교인은 정치 문제에 있어서 무조건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요?
A1. 본문 설교에 따르면, 무조건적인 중립이나 정치적 무관심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도는 이 땅의 시민으로서 국가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책임을 다해야 하며, 특히 사회 정의나 반기독교적인 악법 앞에서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Q2. 성경은 권세에 복종하라고 했는데, 국가 정책에 저항해도 되나요?
A2.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하나님이 부여한 본분을 망각하고 교회를 핍박하거나 성경적 진리(예: 동성애 합법화, 예배 통제 등)를 훼손하려 할 때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 태도라고 강조합니다.
Q3.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A3. 영적인 기도뿐만 아니라,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재정과 봉사로 적극 돕고 헌신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국가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견제하고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에 입각한 입법 활동에 성도들이 동참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 강요(하) 4권 20장 국가 통치’ 신원균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 마지막 장이 왜 국가론으로 끝나는가? 교회와 정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기독교 강요의 구조: 왜 하필 마지막이 국가론일까?

존 칼빈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 강요』 4권은 교회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독특하게도 이 방대한 신학 서적의 대미를 장식하는 20장의 주제는 다름 아닌 ‘국가 통치(국가론)’입니다. 영적인 책이 왜 세속적인 국가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요? 그것은 바로 국가관이 잘못되면 교회의 존립 자체가 치명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역사 속 잘못된 국가관: 일치론과 극단적 분리론

교회 역사 2,000년을 돌아보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 극단적 오류에 빠지곤 했습니다.
첫째는 ‘일치론’입니다. 교황이 국가를 지배하거나(로마 카톨릭), 국가가 교회를 통치 수단으로 삼는(어용 교회) 형태입니다.
둘째는 ‘극단적 분리론(회피주의)’입니다. 도나투스파, 제세례파, 근대의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와 목사는 정치에 신경 쓰지 말고 기도와 예배만 하라”며 정치적 중립과 무관심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는 이러한 무관심주의를 오히려 이단적 사상으로 경계했습니다. 성도는 하늘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의 시민으로서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시민으로서 국가의 책임도 감당해야 되고 교인으로서 교회적 책임도 감당을 해야 되는 두 영역의 두 나라의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 개혁주의의 ‘두 왕국론’과 카이퍼의 정치 참여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에서 출발해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진 정통 개혁주의의 입장은 건강한 ‘두 왕국론(정교분리의 원칙)’입니다. 이는 영적인 일과 국가의 일이 구별됨을 인정하지만, 결코 기독교인이 세상 정치에 침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와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이러한 일상의 업무를 갖고 지켜야 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심령에 대한 영적이 회복을 위한 일들을 책임져야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권증이라면 그건 교회가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책망과 징계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훨씬 더 완성된 형태로 두 왕국론을 발전시킨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웨스미스터 신앙 고백으로 들어왔고 정교 분리의 원칙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그것이 1800년도로 넘어가면서 그 유명한 19~20세기 세계 3대 칼빈주의(개혁신학) 학자·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벤자민 워필드는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 속에서 칼빈주의 신학을 굳건히 지키고 체계화한 주역들입니다.  같은 3대 칼빈주의자에 의해서 영역 주권이라는 단어로 다시 또 발전을 한 겁니다.
실제로 3대 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목사이자 신학자였음에도, 네덜란드가 반기독교적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고 훗날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칼빈 역시 제네바의 시의원들과 협력하여 사회 구제와 정치적 방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했습니다.

4. 오늘날 한국 교회와 성도의 책무

오늘날 사회주의적 평등이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반기독교적 법안(포괄적 차별금지법 등)과 사상들이 사회를 덮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일부에서는 여전히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침묵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신원균 목사님은 기독교인이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십계명적 가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기독교 강요 이제 마지막 항목의 국가 통치 부분에서 왜 칼빈은 국가론을 신앙만 말해도 부족한데 이 기독교 강요의 국가론을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된다라고 하는 이 항목을 집어넣을까? 도대체 국가론을 어떻게 배워야 되는가? 성경적 국가론이라는게 도대체 있는 것인가? 국가론을 왜 배워야 되는가? 이런 부분에서 참으로 놀라운 이 성경 해석의 틀을 잡아 준 겁니다. 그래서 올바른 국가, 교회를 돕는 국가 그래서 국가가 만약 교회를 핍박하면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만들어 준 겁니다. 국가는 훌륭한 국가가 돼야 됩니다. 어떤 국가가 훌륭한 국가입니까? 교회를 돕고 협력하는 그런 국가 위정자들로 세워가라. 만약 그거를 위배하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라. 이 두 가지 개념이 정착됐고 그걸 통해서 후대에 이제 더 발전해 가는 겁니다. 마지막 입국과 통치. 우리 사회에 지금 아주 필요한 또 그러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기도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극단적 신앙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치 지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투표하고 잘못된 법안에는 시민으로서 적극 저항하는 행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칼빈주의이자 개혁주의 국가관의 실천입니다.

5. 기독교 강요 제4권 20장: 성도와 국가

존 칼빈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 강요』가 방대한 신학적 논의 끝에 ‘국가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영적인 가르침이 세속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핵심 이정표이기 때문입니다.

❓ 왜 마지막 장이 ‘국가론’인가?

“국가관이 흔들리면, 교회의 존립과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는다.”
영적인 구원과 예배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성도가 몸담고 살아가는 국가와 정치 체제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교회와 국가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비교

역사 속에서 교회는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할 때 여러 오류를 겪었습니다. 칼빈의 ‘두 왕국론’은 이 사이에서 가장 성경적인 균형을 제시합니다.
관점 핵심 주장 문제점 칼빈주의적 평가
일치론(로마 카톨릭 등) 교회와 국가는 하나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거나, 국가가 교회를 지배) 권력의 타락, 교회의 세속화 및 본질 상실 비성경적 (두 영역의 고유한 역할 무시)
극단적 분리론(제세례파 등) 정치는 세속적이고 악하므로, 성도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회피해야 한다. 사회적 불의 방관, 기독교적 가치의 사회적 영향력 상실 비성경적 (이 땅의 시민으로서의 책임 유기)
두 왕국론(칼빈주의) 교회와 국가는 구별되나, 둘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성경적 대안 (영역은 구별하되 적극적으로 참여)

💡 성도를 위한 3대 정치적 사명

성경적 국가관을 정립한 기독교인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1. 🛡️ 십계명적 공의 실현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올바른 법안과 제도가 세워지도록 정치에 관심을 갖습니다.
  2. 🗳️ 적극적인 주권 행사와 참여
    ‘정치적 중립’이라는 핑계로 침묵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투표하고 목소리를 냅니다.
  3. 🔥 진리를 위한 거룩한 저항
    만약 국가가 신앙의 자유를 탄압하고 반기독교적인 악법을 강요한다면, 신앙의 양심에 따라 단호하게 저항합니다.
Key Insight: 진정한 영성은 골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일터와 사회, 그리고 국가의 정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할 때, 비로소 신앙은 완성됩니다.

❓ 자주하는 질문 (FAQ)

Q1.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정치에 절대 관여하면 안 된다는 뜻 아닌가요?
A. 아닙니다. 정통 개혁주의가 말하는 정교분리는 ‘교회와 국가의 기관적 역할과 영역이 구별된다’는 뜻이지, 기독교인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적 가치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세상 정치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태도입니다.
Q2.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정치 운동을 한 기록이 없지 않나요?
A. 시대적 사명과 상황의 차이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부도덕한 정치를 강하게 책망하다가 순교했고, 예수님 역시 당시 위정자들을 향해 매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 또한 위정자들의 잘못된 재판과 불의를 강력하게 꾸짖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세속 사회의 불의에 눈감는 종교가 아닙니다.
Q3. 훌륭한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왜 정치인(총리)이 되었나요?
A. 카이퍼는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 침투하는 마르크스주의와 세속주의를 막아내고 성경적 가치를 사회 전반(정치, 교육, 문화 등)에 실현하기 위해 직접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참된 칼빈주의가 교회 안의 신앙을 넘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역사적이고 위대한 실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