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강해] 신구약의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신칭의

안녕하세요! 오늘은 분당한마음개혁교회 신원균 목사님의 로마서 11강 주일설교, “신구약의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로마서 4장 1~12절)”의 핵심 내용을 정리해 드립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집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구원의 참된 원리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신구약의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신칭의

1. 구약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로마서 5장까지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를 설명하던 바울은 4장에 들어서며 불현듯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는 신약 성도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질문, 즉 “아직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던 구약 시대 사람들은 율법이나 제사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이 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약과 구약의 구원 방식이 다르다는 오해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공로주의’나 ‘신인협력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로마서 4:1~7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2. 이신칭의를 위협하는 3가지 잘못된 신학적 견해

설교에서는 신구약의 관계를 오해하여 구원론을 왜곡하는 세 가지 입장을 비판합니다.
  • 유대주의: 구약의 율법과 할례, 제사 등 외적인 종교 의식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전형적인 신인협력주의입니다.
  • 세대주의: 구약과 신약을 극단적인 대립 관계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각기 다른 언약(행위, 율법, 은혜 등)을 주셨으나 인간이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구원 역사를 파편화합니다.
  • 일부 회중파 및 침례교의 오류: 신구약 은혜 언약이 ‘하나’라는 것은 인정하나 ‘동일성’은 부정합니다. 구약에는 ‘임시적 은혜 언약’만 있어 온전한 구원에 이른 자가 극소수라고 주장하며 사실상 신구약을 단절시킵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정통 개혁주의의 입장

정통 장로교회는 어거스틴과 칼빈,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전통을 따라 “하나의 동일한 은혜 언약과 두 개의 경륜”을 주장합니다. 구약과 신약은 구원의 본질(은혜 언약, 이신칭의)에 있어서는 완벽히 하나이며 동일합니다. 다만, 그것을 집행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경륜)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 할례, 유월절이라는 그림자와 모형을 통해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고, 신약 시대에는 세례와 성찬, 말씀 선포를 통해 오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외적 형식만 달라졌을 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Westminster Assembly). 출처: 위키백과

4.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다윗

바울은 1세기 유대주의자들의 공로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을 증인으로 세웁니다.
  • 아브라함의 믿음: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입니다. 그가 구원의 증표인 ‘할례’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훌쩍 지난 창세기 17장(99세)의 일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무할례 시에 오직 ‘장차 오실 후손(그리스도)’을 통한 은혜 언약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인침(보증)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가장 큰 상급이셨던 것입니다.
  • 다윗의 고백: 시편 32편에서 다윗은 “불법의 사함을 받고 그 죄를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엄청난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등 대단한 종교적 업적을 남겼지만, 그것을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자신의 죄를 덮어주시는(전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만이 구원의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도 결코 자신들의 율법 준수나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덧입어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신앙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피어나는 공로주의를 경계하고, 오직 믿음(이신칭의)의 굳건한 반석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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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구약 시대 사람들은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열심히 드려서 구원받은 것 아닌가요?
A. 아닙니다. 제사 의식 그 자체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는 장차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모형)였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그 제사가 가리키는 실체이신 메시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Q2.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의로워진 것 아닌가요?
A. 성경의 기록 순서를 보면 그렇지 않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창세기 15장이며, 할례를 받은 것은 훨씬 뒤인 창세기 17장(99세 때)입니다. 즉, 그는 무할례 시에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할례는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외적 보증(인침)’으로 받은 것입니다.
Q3. 정통 장로교회는 구약과 신약의 구원 방법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신약과 구약은 ‘은혜 언약’과 ‘이신칭의’라는 본질에 있어서 완벽히 하나이며 동일합니다.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약은 제사와 할례라는 방식으로, 신약은 세례와 성찬과 말씀이라는 더 명확한 방식으로 다스리시는 ‘두 개의 경륜(통치 방식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기독교 강요(하) 4권 20장 국가 통치’ 신원균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 마지막 장이 왜 국가론으로 끝나는가? 교회와 정치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기독교 강요의 구조: 왜 하필 마지막이 국가론일까?

존 칼빈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 강요』 4권은 교회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독특하게도 이 방대한 신학 서적의 대미를 장식하는 20장의 주제는 다름 아닌 ‘국가 통치(국가론)’입니다. 영적인 책이 왜 세속적인 국가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요? 그것은 바로 국가관이 잘못되면 교회의 존립 자체가 치명상을 입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역사 속 잘못된 국가관: 일치론과 극단적 분리론

교회 역사 2,000년을 돌아보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 극단적 오류에 빠지곤 했습니다.
첫째는 ‘일치론’입니다. 교황이 국가를 지배하거나(로마 카톨릭), 국가가 교회를 통치 수단으로 삼는(어용 교회) 형태입니다.
둘째는 ‘극단적 분리론(회피주의)’입니다. 도나투스파, 제세례파, 근대의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와 목사는 정치에 신경 쓰지 말고 기도와 예배만 하라”며 정치적 중립과 무관심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는 이러한 무관심주의를 오히려 이단적 사상으로 경계했습니다. 성도는 하늘의 시민인 동시에 이 땅의 시민으로서 두 가지 책임을 모두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시민으로서 국가의 책임도 감당해야 되고 교인으로서 교회적 책임도 감당을 해야 되는 두 영역의 두 나라의 책임과 의무를 함께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 개혁주의의 ‘두 왕국론’과 카이퍼의 정치 참여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에서 출발해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이어진 정통 개혁주의의 입장은 건강한 ‘두 왕국론(정교분리의 원칙)’입니다. 이는 영적인 일과 국가의 일이 구별됨을 인정하지만, 결코 기독교인이 세상 정치에 침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와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이러한 일상의 업무를 갖고 지켜야 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심령에 대한 영적이 회복을 위한 일들을 책임져야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권증이라면 그건 교회가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책망과 징계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훨씬 더 완성된 형태로 두 왕국론을 발전시킨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웨스미스터 신앙 고백으로 들어왔고 정교 분리의 원칙 개념으로 자리 잡았고 그것이 1800년도로 넘어가면서 그 유명한 19~20세기 세계 3대 칼빈주의(개혁신학) 학자·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벤자민 워필드는 자유주의 신학과 세속화 속에서 칼빈주의 신학을 굳건히 지키고 체계화한 주역들입니다.  같은 3대 칼빈주의자에 의해서 영역 주권이라는 단어로 다시 또 발전을 한 겁니다.
실제로 3대 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목사이자 신학자였음에도, 네덜란드가 반기독교적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고 훗날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칼빈 역시 제네바의 시의원들과 협력하여 사회 구제와 정치적 방향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했습니다.

4. 오늘날 한국 교회와 성도의 책무

오늘날 사회주의적 평등이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반기독교적 법안(포괄적 차별금지법 등)과 사상들이 사회를 덮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일부에서는 여전히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침묵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신원균 목사님은 기독교인이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십계명적 가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기독교 강요 이제 마지막 항목의 국가 통치 부분에서 왜 칼빈은 국가론을 신앙만 말해도 부족한데 이 기독교 강요의 국가론을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된다라고 하는 이 항목을 집어넣을까? 도대체 국가론을 어떻게 배워야 되는가? 성경적 국가론이라는게 도대체 있는 것인가? 국가론을 왜 배워야 되는가? 이런 부분에서 참으로 놀라운 이 성경 해석의 틀을 잡아 준 겁니다. 그래서 올바른 국가, 교회를 돕는 국가 그래서 국가가 만약 교회를 핍박하면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만들어 준 겁니다. 국가는 훌륭한 국가가 돼야 됩니다. 어떤 국가가 훌륭한 국가입니까? 교회를 돕고 협력하는 그런 국가 위정자들로 세워가라. 만약 그거를 위배하면 목숨을 걸고 저항하라. 이 두 가지 개념이 정착됐고 그걸 통해서 후대에 이제 더 발전해 가는 겁니다. 마지막 입국과 통치. 우리 사회에 지금 아주 필요한 또 그러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기도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극단적 신앙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치 지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투표하고 잘못된 법안에는 시민으로서 적극 저항하는 행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칼빈주의이자 개혁주의 국가관의 실천입니다.

5. 기독교 강요 제4권 20장: 성도와 국가

존 칼빈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 강요』가 방대한 신학적 논의 끝에 ‘국가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영적인 가르침이 세속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핵심 이정표이기 때문입니다.

❓ 왜 마지막 장이 ‘국가론’인가?

“국가관이 흔들리면, 교회의 존립과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는다.”
영적인 구원과 예배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성도가 몸담고 살아가는 국가와 정치 체제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교회와 국가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비교

역사 속에서 교회는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할 때 여러 오류를 겪었습니다. 칼빈의 ‘두 왕국론’은 이 사이에서 가장 성경적인 균형을 제시합니다.
관점 핵심 주장 문제점 칼빈주의적 평가
일치론(로마 카톨릭 등) 교회와 국가는 하나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거나, 국가가 교회를 지배) 권력의 타락, 교회의 세속화 및 본질 상실 비성경적 (두 영역의 고유한 역할 무시)
극단적 분리론(제세례파 등) 정치는 세속적이고 악하므로, 성도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회피해야 한다. 사회적 불의 방관, 기독교적 가치의 사회적 영향력 상실 비성경적 (이 땅의 시민으로서의 책임 유기)
두 왕국론(칼빈주의) 교회와 국가는 구별되나, 둘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성경적 대안 (영역은 구별하되 적극적으로 참여)

💡 성도를 위한 3대 정치적 사명

성경적 국가관을 정립한 기독교인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1. 🛡️ 십계명적 공의 실현
    사회적 약자를 돕고,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올바른 법안과 제도가 세워지도록 정치에 관심을 갖습니다.
  2. 🗳️ 적극적인 주권 행사와 참여
    ‘정치적 중립’이라는 핑계로 침묵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가치를 수호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투표하고 목소리를 냅니다.
  3. 🔥 진리를 위한 거룩한 저항
    만약 국가가 신앙의 자유를 탄압하고 반기독교적인 악법을 강요한다면, 신앙의 양심에 따라 단호하게 저항합니다.
Key Insight: 진정한 영성은 골방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일터와 사회, 그리고 국가의 정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할 때, 비로소 신앙은 완성됩니다.

❓ 자주하는 질문 (FAQ)

Q1. 정교분리의 원칙은 교회가 정치에 절대 관여하면 안 된다는 뜻 아닌가요?
A. 아닙니다. 정통 개혁주의가 말하는 정교분리는 ‘교회와 국가의 기관적 역할과 영역이 구별된다’는 뜻이지, 기독교인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적 가치와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세상 정치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태도입니다.
Q2.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정치 운동을 한 기록이 없지 않나요?
A. 시대적 사명과 상황의 차이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부도덕한 정치를 강하게 책망하다가 순교했고, 예수님 역시 당시 위정자들을 향해 매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 또한 위정자들의 잘못된 재판과 불의를 강력하게 꾸짖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세속 사회의 불의에 눈감는 종교가 아닙니다.
Q3. 훌륭한 신학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왜 정치인(총리)이 되었나요?
A. 카이퍼는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 침투하는 마르크스주의와 세속주의를 막아내고 성경적 가치를 사회 전반(정치, 교육, 문화 등)에 실현하기 위해 직접 기독교 정당을 만들고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참된 칼빈주의가 교회 안의 신앙을 넘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역사적이고 위대한 실천 사례입니다.